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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싱가포르와 국부 리콴유에 대해서

며칠간 이슈인 싱가포르의 코로나바이러스 대처에 대해서 알아봤었는데요. 이어서 오늘은 짤막하게 싱가포르 정부 수립과 싱가포르의 역사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안타깝게도 싱가포르라는 나라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 굵직 굵직한 사건들과 정보들을 추려서 제 나름대로 전달해보려고 합니다.  

 

 

리콴유는 누구인가? 

 

 

리콴유, 한국어 독음으로 이광요라고 불리는 이 분은 현재 싱가포르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싱가포르 역사상 가장 위대했고 유명한 인물로 꼽힙니다. 그가 만든 인민행동당 (People's Action Party, PAP)는 싱가포르 출범 이래로 한번도 여당 자리를 내어준 적 없는 당이죠 (사실상 당이 한개밖에 없긴 합니다만) 그는 영국령 싱가포르에서 태어나서 케임브리지 법학 대학을 나온 수재이고 후일 싱가포르로 돌아와 정치에 입문하게 됩니다. 그 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말레이시아에 잠깐 속했던 싱가포르는 다시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을 하게되고 이때부터 리콴유와 싱가포르의 기적같은 역사는 시작됩니다.

 

 

재밌는 사실로는 이 사람은 무려 박정희가 우리나라 대통령일때 싱가포르 총리를 하고 있던 양반입니다. 그리고 2015년에 병으로 사망할 때 까지 내각에서 나라를 이끌었죠.

 

 

 

"그의 뿌리와 출신"

 

짤막하게 그의 배경을 나열하자면, 그의 아버지 리친쿤은 영국령 싱가포르에 3대째 정착해 있었던 화교 (객가족) 집안으로써 부유할 뿐더러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아 영어에 능통했고, 그래서 아들 리콴유에게도 중국어식 이름 콴유뿐만 아니라 해리(Harry)라는 영어식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많은 분들이 모르셨겠지만, 리콴유의 모국어는 영어였고 자라면서 사용했던 이름도 해리였습니다. 마치 지금도 홍콩 사람들이 영어 이름 뒤에 중국어 이름을 붙인 일종의 영 - 중 혼합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처럼 리콴유는 "Harry Lee Kuan Yew"였죠. 그는 후일 정치에 입문하면서 한족계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해리라는 영문 이름을 붙이지 않고 리콴유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싱가포르의 독립"

사실상 싱가포르의 역사 중 가장 임팩트 있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독립된 싱가포르로서의 첫 출발이었죠.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후 말레이시아 속해있던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사실상 축출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말레이시가아 화교 인구가 다수인 싱가포르의 존재를 국가 통합성, 내부 안정에 장애를 초래하는 위협이라고 인식했던 것 때문입니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가 떨어져나간후로도 1969년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중국계 야당이 약진하는 일이 벌어지자 폭동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계엄령이 몇년간 실시 된 뒤에 말레이계 주민에 대한 우대정책이 시행되어 화교와 인도계에 대해서 차별정책을 진행시키게 되고 현재 다수인 말레이인들은 우대받고 소수인 화교들은 차별받는 저희가 알고 있는 말레이시아가 되어버립니다. 

 

 

 

"싱가포르를 선진국으로 만든 힘"

한가지로 딱 정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정권을 잡고나서 물도 자원도 없는 허허벌판 섬인 싱가포르를 발전시키려고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싱가포르의 가장 큰 자원이 있었다면 말라카 해협을 지나다니는 상선이라면 지나갈 수 밖에 없는 항구라는 점이였죠. 이런 천혜의 지리조건으로 싱가포르는 추후 물류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태형제도, 무거운 벌금제도, 마약에 무관용적인 사형제도등 싱가포르를 법치국가의 모델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전세계에서 싱가포르하면 깨끗하고 법이 무서운 나라로 인식하게 됩니다. 

 

 

또한 리콴유 본인이 엘리트였던 탓도 있었지만 상위 10퍼센트 엘리트 양성에 굉장히 치중을 했습니다. 지금도 싱가포르의 요직이나 각종 정재계의 인물들은 정부의 장학금을 받고 싱가포르 탑스쿨에서 공부했었던 학생들이죠.

 

 

싱가포르인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그리고 작은 섬에 불과했던 싱가포르의 자주국방을 위해서 한국처럼 징집제도를 만듭니다. 2년간 싱가포르 군대에서 복무하면서 애국심과 '싱가포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불어넣기 위함이였죠. 

 

 

이렇게 엄청난 일들을 했던 리콴유도 사람인지라 리콴유가 시행했던 다른 정책들을 보면 정말 희한하고 말도 안되는 정책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리콴유의 흑역사정도로 생각하는데요. 다음에 리콴유가 밀었던 특이한 정책들에 대해서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사망"

그렇게 영원히 살 것 같았던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는 2015년 사망합니다. 이 때 싱가포르 전국에서의 추모행렬이 대단했었죠. 저는 그 때 싱가포르의 대학생으로 재학중이었습니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제 싱가포르 친구들 대부분은 리콴유를 추모하기위해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었습니다. 싱가포르 그 자체였던 리콴유의 죽음과 함께 싱가포르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싱가포르와 싱가포르 사람들은 처음 겪어본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고 추모를 위해 리콴유의 얼굴과 함께 검은 리본이 그려진 스티커가 유행했었죠. 

 

 

 

"후계자"

사실 죽기 오래전부터 리콴유는 1991년에 이미 일선에서 물러서서 정부에 자문을 주는 Minster Mentor로써 일하고 있었는데요. 처음에는 같은 당의 고촉통에게 총리자리를 잠깐 넘겼고 그 다음 총리자리는 그의 아들 리셴룽 (Lee Hsien Loong)이 갖게 되어 지금까지 통치를 하고 있습니다. 

 

 

 

"끝맺음: 그가 만든 싱가포르"

리콴유는 뼈 속부터 엘리트였던 사람입니다. 그의 이러한 배경은 그의 국가 통치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는데요. 

싱가포르는 엘리트주의의 나라가 되었죠. 초등학교부터 PSLE라는 국가 입시 시험을 통해 명문 중학교등을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졌을 뿐더러 중학교에서도 'O' Level이라는 영국식 시험을 통해서 Junior College (한국으로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A' Level이라는 영국식 대입시험을 통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 이지요.

 

 

한국도 입시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싱가포르 만큼의 입시지옥은 가히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진학할 때 보는 대입시험이야 여느 나라나 비슷한 사정이라고는 하지만 초등학교나 중학교마저 입시 시험이 있다는게 한국인으로서는 충격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렇듯 한번 낙오하게되면 철저하게 엘리트주의 시스템의 메인스트림에서 배제될 수 있으므로 초등학교, 심지어 유치원때 부터 자식들을 좋은 학교로 보내려고 부모님들은 사교육에 열성입니다. 싱가포르의 교육 부분에서는 따로 자세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이러한 인재들은 중학교때부터 정부로부터 Government Scholar (국가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비 전액 면제로 용돈까지 받으면서 대학교까지 다니게 되죠. 그리고 학업을 다 마치게되면 공무원 연봉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싱가포르 정부에서 고위직으로 일할 수 있게 됩니다.

 

 

이쯤되면 싱가포르의 엘리트주의라는게 실감이 되실겁니다. 철저히 능력에 기반한 엘리트주의. 분명 좋은점도 나쁜점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리콴유처럼 비전이 있고 나름 청렴했던 엘리트들은 지금의 싱가포르를 만들었습니다. 리콴유가 자신의 정체성을 녹여낸 국가. 그게 바로 싱가포르가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